시작하는 말로 꼭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저는 학창시절에도 필기하길 좋아하는 학생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낙서조차 잘 하지 않을만큼 학습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필기 외에는 펜을 쓸 일이 없었죠. 성년이 되고도 그 습성은 바뀌지 않더군요. 예쁜 문구류를 사도 정작 쓸 데가 없었어요. 다이어리를 시작해도 노트 몇장 쓰고 버리기 일쑤였고 새 펜을 들고 뭘 쓸까 고민해봐야 쓸 말이 없어서 귀로 들리는 노랫가사나 끄적이다 마는. 저는 필기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책을 좋아하다보니 많이 읽게 되었고, 많이 읽다보니 쓰고 싶어졌는데 가진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여 소설 필사를 해볼까? 했던 것이 이 취미의 시작이었습니다. 필기하길 즐기지 않으니 몇권 쓰다 말겠거니. 몇권 쓰다 말더라도 작심삼일이 10번 거듭되면 한달이 되듯 의욕이 생길 때마다 하다보면 안하니만 낫지 않겠냐 하는 마음이었는데요. 웬걸요, 3년 꼬박 필사 취미생활에 푹 빠져 있으리라고 저 자신도 예상 못한 일이었어요.
필기를 즐기지 않던 건 쓸 말이 없어서- 였다는 걸 소설 필사를 하면서 알았어요. 잘 쓰여진 타인의 소설을 한 문장 한 문장 머리로 되뇌며 글씨로 옮겨 쓰는 과정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답니다.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한 문장 한 문장 따라 쓰는 그 시간이 피로에 찌든 하루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 같았어요.
… 글씨로 인생이 바뀐다!
얼마전 유퀴즈온더블럭 147화에 국내 1호 필적학자 구본진 박사님이 출연하셨어요. 관심이 생겨 해외 사례, 서적 구해가며 취미로 공부하셨다고 해요. 변호사 일을 본업으로 하며 취미삼아 필적학 전문지식을 쌓아오신 거예요.
글씨로 인생이 바뀐다. 손글씨를 몇달 몇년째 써본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정말 바뀐다'라고 말한다. 서예로 인격 수양한다는 말은 논문 또는 해외 연구로 검증되었듯이, 연필(펜)과 종이만 있으면 자기 인생을 바꿀 수 있는데 지금 손글씨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저야말로 3년째 글씨 쓰기를 지속해온 산증인 아니겠어요? 저 역시 바뀌었어요. 생활에 조급함이 덜어지고 화가 줄어들었어요. 물론 저는 필사하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며 썼지, 글씨 교정에 신경쓰며 글씨를 쓰지 않았음에도 말이죠. 조용한 음악에 누군가 고민고민하며 공들여 쓴 문장을 느린호흡으로 따라 쓰는 것 자체로 인생이 바뀌다니. 참 신기한 경험이죠.
… 혼자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이 취미는 어디서든 펜과 종이만 있으면 지속해 나갈 수 있어요. 식사 후 업무 제개 전에 잠깐, 누군가를 기다릴 때, 카페에서 혼자 멍 때리고 있기 뭐할 때 펜과 노트를 꺼내 쓰면 되죠.
자투리 시간에 스마트폰을 헤매느라 필요 없는 유희거리에 시간을 너무 빼앗겼다 싶어 후회해본 분께는 마침맞는 취미일 수 있겠어요. 저는 늘 단순주입식의 영상 미디어, 충동구매 부추기는 스마트폰 속 세상에 넋놓고 빠져 있던 시간을 후회했거든요. 그보다는 좀 더 나 자신의 영혼을 배불릴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을 필사로 채워가고 있어요.
노트와 만년필 하나만 가방에 챙겨 나가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뜻밖에 얻은 취미생활의 시간이 될 수 있죠. 늘 들고 다니는 핸드폰으로 좋은 글귀를 검색해 따라 쓰면 되니 필사책 바리바리 싸들고 다닐 필요도 없어요.
혼자 바람 쐬고 싶어 근교로 운전해 나갔는데 막상 어딜 가서 혼자 멍 때리나 싶을 때. 벤치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창 밖 풍경만 바라보고 있자니 좀 지루한데 귀가하자니 드라이브밖에 되지 않는 이 시간이 아쉬울 때. 펜과 종이 꺼내 필사하면 고요한 풍경과 카페 음악과 좋은 글귀들이 마음을 충전시켜 줄 거예요.
… 쓰고 싶은 문장만 써도
책 읽다보면 따로 기록해두고 싶은 문장들이 있죠. 그런 문장만 예쁜 노트에 부드러운 펜으로 필사해 보는 것도 좋아요. 블로그 포스팅을 남겨놓는 것보다 손글씨로 따라 쓰는 쪽이 좀 더 마음에 쌓이죠. 잘 써진 소설은 통필사로 전체쓰기 해도 좋아요. 하루 30분 정도씩, 매일이 아니더라도 생각날 때 식탁에 앉아 필사해요. 나이들며 느려진 두뇌가 문장들을 한꺼번에 흡수하지 못하더라도 가랑비에 옷 젖듯 계속 쓰다보면 언젠가 스며들겠거니- 10년은 써보자는 생각으로 쓰죠.
꼭 책 전체를 써야 한다는 부담 없이 쓰고 싶은 문장을 자유롭게 필사하면 되요. 따라 쓰는 그 순간의 행위가 나에게 쌓이는 것이지 글씨를 써 모은 노트가 나에게 쌓이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 좋은 문장이 쌓이는 시간
누군가 공들여 써 놓은 문장들을 따라 써보는 것만으로도 그 문장이 내 인생에 녹아들더군요. 제가 필사 취미생활을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예요. 좋은 문장이 잔뜩 있는 명언 책도 좋구요. 문장력이 뛰어난 국내 작가님들 책을 필사하는 것도 좋아요. 뭐든 '나'에게 좋은 자극을 주는 글을 필사하면 되니 부담없이 시작해도 되요. 좋은 책은 두번 세번 써도 되구요.
돈벌이와 생활에 익숙해지다보면 무기력한 마음이 들 때도 있고 쳇바퀴 도는 것처럼 삶의 무의미함이 기를 꺾을 때도 있지요. 그럴 땐 인생의 조언이나 명언, 의욕을 북돋는 말들을 부러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변화를 도모하지 않으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므로. 그럴 때 시작하기 좋은 취미생활이기도 해요.
… 필사하기 좋은 소설
명언책은 어떤 책이든 좋을테고 네이버 명언 검색해도 많이 나오는데 소설책 필사는 추천이 별로 없어요. 경험상 첨언정도로 추천하자면 일단 번역된 외국소설보다는 국내 소설이 좋아요. 한글로 쓰여진 문자들이 단어와 행간의 의미를 더 절절히 와닿는데다 표현이 훨씬 풍부하거든요.
국내 작가님들 중 <오정희 / 한강 / 이승우 / 김애란 / 김금희 > 책은 필사하기 참 좋은 책이라고 느꼈구요. 특히 오정희 작가님 문장은 몇번 거듭 필사해도 좋겠다 싶을만큼 오차 없이 의미 전달이 완벽한 문장들이었어요. 최근 이승우 작가님 책도 필사하고 싶을만큼 문장이 좋다고 느껴 다음 책으로 찜해두었답니다.
만약 소설작가가 되기 위한 연습으로 필사를 시작하신다면 출판사마다 연간으로 출판하는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등을 필사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예요. 소설에도 트렌드라는 게 있고 그걸 파악하기 좋은 게 바로 최근 수상작이거든요. 이미 심사위원들의 검토를 거친 수상작품이 우리 시간을 아껴주죠. 매일 수많은 책들이 수많은 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지만 그 중 완성도 있는 문장과 인간심리를 예리하게 담아낸 책을 찾기란 그야말로 '모래 속에서 바늘 찾기'니까요.
독서도 여러권 교차해 읽어나가는게 좋다고들 하는데 저는 필사야말로 몇 권씩 꺼내놓고 교차해 쓰기 좋은거 같아요. 단문이 돋보이는 현대 작가의 책과 장문이 수려한 오정희 작가님의 책을 나란히 꺼내두고 필사하고 있는데요. 느린 호흡으로 문장을 머리에 몇번씩 되새기며 읽기 때문에 교차쓰기 해도 독서하는데 문제가 없어요. 특히 만년필로 하는 필사라면, 만년필 종류와 노트 종류를 다르게 꺼내놓고 책 몇권 번갈아 필사하기 더 좋아요.
글도 취향을 타고 어떤 분께 좋은 책이 어떤 분께는 별로일 수도 있어서 정석처럼 어떤 책이 좋다 할 수 없으니 읽고 싶은 책, 쓰고 싶은 글귀는 뭐든 쓰기 시작하면 된답니다. 꼭 문장을 그대로 베낄 필요도 없어요. 머리로 읽고, 글로 쓰면서 더 편안한 문장으로 써보는 것도 하나의 훈련이 될테니까요.
… 만년필 취미생활
만년필은 필사하기에 참 좋은 필기구예요. 젤펜이나 볼펜과 달리 힘주어 꾹 눌러 쓸 필요없이 아주 부드럽게 필기되거든요. 게다가 갖가지 잉크와 종이 선택에 따라 글씨 쓰는 맛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소설 필사와 별개로 만년필 자체가 하나의 취미생활이 되줘요.
낚시에 빠진 분들이 낚시의 매력은 '손맛'이라고들 하잖아요. 만년필 역시 '손맛'이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3만원짜리 만년필 하나와 다양한 브랜드의 소분 잉크 여러개, 표면감이 다른 만년필 노트 몇종류 사서 한달 내내 '손맛' 느끼며 취미시간을 보낼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제 필사 취미가 3년째 지속되어 올 수 있었던 근본은 만년필 필사로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노트만 잘 골라 써도 필기 시작이 훨씬 즐겁고 잉크 종류 바꿔가며 쓰는 재미도 쏠쏠해요. 요즘은 1천원 2천원짜리 만년필도 워낙 잘 나오는 거 아시나요? 적은 비용으로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답니다. 이 긴 글을 읽어주신 데에 보답하는 의미로 팁을 드리자면, 최소비용으로 갓성비 만년필 필사를 하겠다- 싶으시다면 <트위스비 에코 EF촉 또는 F촉 + 토모에리버 노트 + 파카 큉크 잉크> 조합으로 구입해 시작해보세요. 에코 만년필은 제가 60구 넘는 만년필을 수집해 써보고 갓성비 1위로 꼽은 고퀄 제품이고 토모에리버 노트는 잉크를 거의 가리지 않고 훌륭한 필감을 주는 노트거든요.
저는 만년필로 소설 통필사를 시작한지 3년 되었어요. 어떤 취미든 도구부터 신나게 사들였다가 몇달만에 질려 쓰레기만 만들던 제가 이번엔 3년 넘게 질리지도 않고 필사를 지속해가고 있어요. 심지어 필사하는 시간은 점점 좋아지고 있죠. 지적 향상이 이루어졌다고 단언하기 조심스럽지만 화가 많던 마음은 확실히 차분해졌답니다. 신기하게도 정말 그렇게 되었어요. 여전히 가끔 화가 나고 가끔 모든 게 싫지만 예전에 비하면 훨씬 편안해요. 마음이 편해지는 취미라는 점에서도 저는 필사 시작한 게 제 인생에서 손꼽히게 잘 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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